전세중 | 강동소방서 예방과장

우리나라 역사서의 대형화재에 대한 기록은 삼국시대까지 올라간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13대 미추왕(서기 262년) 때 금성 서문에 화재가 발생해 민가 100여동이 소실됐다”는 기록이 있다.

서기 596년인 진평왕 18년에도 영흥사에 불이 나 왕이 친히 이재민을 위문하고 구제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삼국시대부터 화재가 사회적 재앙으로 인식돼 국가적 관심사였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기도 하다.

역사서에는 소방서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등장하지는 않으나, 고려 때의 기록을 보면 소방훈련에 관한 것이 있다. “1145년 고려 인종 때 임금이 동석한 가운데 궁궐 내 수문전에서 소재도장이라고 하는 궁중소방 훈련을 실시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소재도장은 궁궐 내 화재만을 대상으로 설치한 것이기에 공공 소방기관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공 소방기관은 조선시대 세종대왕(1426년) 재위 당시 설치한 금화도감(禁火都監)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당시 한성(서울)에 큰 화재가 두 번이나 발생해 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세종대왕이 내놓은 종합 화재방지 대책이 바로 금화도감이다.

금화도감에 소속돼 불을 끄는 일을 하던 이들은 ‘금화군’이라 불렸다. 그들은 군인이나 공노비로 구성되어 도성 곳곳을 다니며 화재를 감시하고, 화재 발생 시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역할도 했다. 방화범에 대한 검거의 권한도 주어졌다. 그러나 금화군은 세조 때 ‘멸화군’(滅火軍)으로 이름을 바꾸고, 1460년 구조조정에 따라 한성부로 흡수되는 상황을 맞게 됐다.

예전에도 소방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세종 때 편찬된 ‘고려사’에 “1051년 문종 5년 2월 백령진의 성곽과 민가가 소실돼 백령진장 최성도, 부장 최숭음을 관직에서 삭탈했다”는 내용이 있다. 우리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화재와 관련된 처벌이다.

소방법은 조선시대 경국대전의 편찬으로 그 골격을 갖추게 된다. 1417년 태종 17년에 명나라의 법률을 사용해 실화자와 방화자에 대한 형벌을 정하고 시행했다. 실화와 방화로 자기 집을 태운 자는 각각 곤장 50대와 100대를 맞았다. 또 인명피해를 입힌 자는 곤장 100대, 관·민가를 태운 자는 곤장 100대에 3년간 추방하도록 했다.

최초의 근대식 소방서는 1925년 4월 서울 중구 남창동에 들어섰던 경성소방서다. 경성소방서가 들어서면서 ‘관(官) 주도’의 소방체계가 잡혔다. 조직은 단촐해서, 소방서장 아래 펌프반, 수관반, 파괴반, 사다리반을 두었다. 불이 나면 펌프반은 장정 6~9명이 달라붙어 완용(腕用) 펌프를 앞뒤서 끌고 밀면서 현장으로 달려갔다. 펌프 앞머리에는 지금의 사이렌 같은 쇠종이 달려서 불차의 출동을 알렸다.

파괴반은 갈고리로 재를 긁으며 마지막 불씨까지 정리를 하는 임무를, 사다리반은 건물에 올라 인명을 구하는 임무를 각각 수행했다. 당시도 지금처럼 소방 헬멧을 쓰고 방화복을 입었다. 방화복에는 소속을 알리는 ‘경성’이라는 문자도 찍혀 있었다. 경성소방서는 1937년 태평통으로 이전하고 해방 후에는 서울소방서로 명칭을 바꾸었다. 또 1949년에는 서울중부소방서, 1983년에는 종로소방서로 각각 개칭했다.

2012년 기준으로 보면 전국에 193개의 소방관서가 설치되어 있다. 지금의 소방관은 불 끄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재해 예방과 대책수립, 인명구조, 재난 현장 복구 등의 업무도 총괄한다. 소방관의 역할과 위상이 예전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것이다.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고 생명을 지키는 소방관들. 우리 국민 모두가 그들의 노력과 열정에 큰 박수를 보낼 때 우리나라는 재해에 더욱 안전하고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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