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면 한국위험물학회장(연세대 연구교수)

"이해관계자 모두가 안전에 관심 가질 수 있는 환경부터 조성돼야"

올해 초 안전보건관리 패러다임의 대대적인 변화를 이끌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이 본격 시행됐다.

법 시행 전후로 노·사·민·정·학 각계에서는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경영책임자등이 안전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아도 크게 손해 보지 않는 기존 산안법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만큼 기업을 이끄는 경영진들의 강화된 안전리더십을 바탕으로 중대재해가 획기적으로 감소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처법이 시행된 지 수개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중대재해는 일터 곳곳의 빈틈을 파고들며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법이 제정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우리가 기대하는 수준만큼의 가시적인 변화가 나타나기위해서는 어떠한 부분을 보완하고 개선해 나가야 할까.
 

기업, 정부, 학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전문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활발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권혁면 한국위험물학회장(연세대 연구교수)을 만나 그 해법을 들어봤다.

 

Q. 학회장님에 대한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화학공학을 전공한 이른바 ‘엔지니어’ 출신입니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해 화공플랜트 설계 업무 등을 맡으며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산업현장 일선에서 잔뼈가 굵어가던 중 일터에서의 안전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을 깨닫게 됐고, 우연한 기회로 안전보건공단에 몸담게 되면서 안전과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특히 공단에서 안전보건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던 경험은 안전과 보건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을 갖게 된 커다란 자양분이 됐습니다.

공단을 나와서부터는 후학 양성을 위해 연세대 연구교수로 활동하며 안전에 대한 관심을 지속 유지해 왔고, 그 결과 그간 다양한 경험과 전문성을 인정받아 올해부터 제10대 한국위험물학회장, 경사노위 산업안전보건위원회 공익위원을 맡아 우리나라 안전보건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Q. 한국위험물학회를 비롯해 현재 참여하고 계신 경사노위 산업안전보건위의 역할과 의의가 궁금합니다.
사단법인 한국위험물학회(Korean Institute of Hazardous Materials, 이하 학회)는 지난 2012년 경북 구미 불산가스 누출사고를 계기로 창립됐습니다. 위험물 및 그 안전에 관한 연구와 관련 정보의 원활한 교류를 통해 학술의 발전과 국민의 생명 및 재산보호에 기여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일상용품 대부분은 화학제품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제품을 생산하는 데 있어 투입되는 원료가 화재나 폭발, 독성의 성질을 가진 위험물이 많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화학제품 산업의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이 예상되는 만큼, 우리 학회에서는 각종 위험물에 대한 체계적인 안전관리, 선제적인 대책 마련에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해 나갈 방침입니다. 특히 올해 중으로 중처법 시대 위험물 안전관리 방안 등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를 이어나갈 것입니다.

다음으로 경사노위 산업안전보건위원회는 중대재해 예방을 목표로 노동계, 경영계, 정부, 학계 등이 머리를 맞대기 위해 발족됐습니다. 산재예방사업 효율성 제고 방안, 중대재해 사고원인조사 강화 방안, 기업의 법 준수환경 조성 및 법·제도 개선 방안, 안전문화 조성을 위한 노사참여 확대 방안 등을 주요 의제로 삼고 있습니다. 노동계, 경영계, 정부, 공익위원 등 총 15인으로 구성돼 있으며, 개인적으로 저는 공익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중대재해 예방을 위해서는 모든 이해관계자의 참여와 공감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경사노위 산안위가 중대재해 근절을 위한 긴요한 사회적 대화 채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Q. 올해 초 본격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 어떻게 평가하고 계신가요?
중처법은 우리나라 안전분야에 있어 상징적인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전을 도외시 한 채 성장과 발전에만 집중해온 경영책임자 등에게 확고한 안전의식을 갖추고 빈틈없는 자율안전관리시스템을 구축해달라는 국민들의 요구가 담겨 있습니다.

처벌 여부를 떠나서 처벌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경영책임자 등에게 전달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기존의 산업안전보건법보다 안전에 대한 사업주의 역할과 의무를 한층 강화한 만큼, 안전을 우선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주효한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 그 변화는 나타나고 있습니다. 많은 수의 기업들이 이미 법 시행 전후로 기존과는 다른 차원의 안전보건관리체제 구축에 만전을 기하고 있고, 현장 안전점검에도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기업 내 전사적 안전보건관리를 총괄하는 C레벨(Chief)급의 임원이 늘고, 안전관리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관련 투자와 인력이 대폭 확대되고 있는 점도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입니다.
 

Q. 중처법 시행에도 불구하고, 획기적인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단언컨대 중처법은 매직 솔루션이 아닙니다. 기업을 이끄는 경영진들이 안전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는 데에는 효과를 볼 수 있어도, 중대재해의 획기적 감소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시스템 안전 및 인지 과학자인 리처드 쿡 박사에 따르면 중대재해는 18가지의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발생합니다. 다시 말해 강력한 법과 제도가 마련됐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중대재해가 획기적으로 감소되기는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중처법이 제정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이른바 ‘지시적 규제’와 ‘자율적 규제’가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지시적 규제는 고소작업 시 안전대를 착용할 것, 밀폐공간 작업 시 유해가스 농도를 측정하고, 송기마스크 등 호흡용 보호구를 착용할 것 등 사업장에서 반드시 지켜야할 명확한 준수사항을 말합니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관한 규칙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반면 자율적 규제는 최고경영자부터 시작해 노동자까지 자율적 의지에 기반해 수행하는 것으로 법정 수준 이상의 활동 등을 말합니다. 지난 2013년 도입된 위험성 평가 제도를 비롯해 사업장 내 각종 위험요소를 경영책임자등이 묵인 방치하지 않도록 안전보건관리체제를 구축·이행토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중처법도 자율적 규제의 일환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산업안전보건법 즉 지시적 규제 패러다임 속에서 안전관리가 이뤄져 왔습니다. 중대재해의 획기적 감소를 이뤄낼 수 있는 자율적 규제 준수에 대한 사업장의 역량, 준비사항, 산업현장 전반적인 안전문화 수준 등은 여전히 미흡하다는 것이 현재 중처법이 국민들의 눈높이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가시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 주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Q. 중대재해 예방을 위한 기업의 자율적 노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먼저 원·하청 사업주, 노동자 등 모든 주요 이해관계자가 안전보건의 수준 향상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공감대가 구축돼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산업현장에서는 이해관계자 모두가 안전을 중시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갖기 어렵습니다.

대표적으로 최저가입찰 위주의 원·하청 계약구조, 불법 재하도급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즉, 공기가 돈이자 기업 생존을 판가름 짓는 상황에서 모든 부담을 떠안고 있는 최종 하청업체가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기에는 구조적으로 어려운 상황입니다.

‘광주 신축아파트 붕괴사고’, ‘광주 학동 철거건물 붕괴사고’, ‘이천 물류창고 화재사고’ 등 사회적 공분을 자아낸 대형 사고 등의 배경에는 안전보다 비용을 중시할 수 밖에 없었던 이러한 문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협력사의 안전을 바라보는 원청의 눈높이를 높여야 합니다. 과거 독일 벤츠사를 방문해 안전담당이사와 위험의 외주화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크게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법률적 규제 조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요구하는 안전보건관리 역량을 갖추지 않은 기업의 제품은 납품받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는데요. 그 이유는 언론과 고객들이 협력사의 실수도 본사 책임으로 보고 비판하는 만큼, 기업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파트너사의 안전에도 각별한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최근 우리 정부도 하청 산재에 대한 원청 책임을 강화하고, 안전관리 역량이 미흡한 시공사는 공공기관 입찰을 제한하는 등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시도에 나서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우리나라 언론과 국민들도 기업들이 안전을 브랜드 가치의 중요한 요소로 여길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Q. 오는 2024년이면 5~49인 사업장에도 중처법이 적용됩니다. 이들 사업장은 대기업과 비교해 안전관리가 상대적으로 취약해 많은 이들이 우려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지난해 기준 산재 사고사망자의 81%(670명)가 50인 미만 중소사업장에서 발생했습니다. 구체적으로 5~49인, 5인 미만 사업장에서 각각 42.5%(352명), 38.4%(318명)로 집계됐습니다. 이를 통해 당장 2024년 1월부터 중처법을 적용 받는 사업장에서 전체 산재 사망사고의 절반 가까이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상황이 수십년 째 계속되어 오고 있는데, 그 이유는 개별 기업에서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크게 체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지난해 사고재해율은 0.53%로, 사업장 규모별로 봤을 때 100인 사업장의 경우 2년에 1건, 20인 사업장은 10년에 1건, 10인 사업장은 20년에 한 건 꼴로 사고재해가 발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업을 이끄는 경영진 측면에서 사고재해가 발생하게 되면 ‘운이 좋지 않았다’고 느끼며 개선책 마련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게 되는 배경입니다.

또한 산재가 발생하더라도 산재보험이 경제적 측면에서 많이 해결해 주고 있기 때문에 중대재해 예방을 위해 대대적인 개선 및 투자 등에 나서야 할 필요성을 사업주가 못 느끼고 있는 점도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는 주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됩니다.
 

Q. 전국의 사업주, 노동자, 안전보건관계자 여러분들게 당부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기업의 안전관리 역량이 곧 기업 경쟁력임을 인식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확산돼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선 정부는 중소사업장 노후 위험시설 개선을 위한 대대적인 재정 지원에 나서는 가운데 기업 스스로 안전관리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다양한 재정적, 정책적 인센티브 등을 마련해야 합니다. 또한 대기업 등 원청도 협력업체 스스로 안전관리 역량을 제고해 나갈 수 있도록 계약 시스템 개선 등 보다 구조적인 변화에 나서야 합니다.

끝으로 언론, 시민단체, 국민들 모두가 꾸준한 견제와 비판을 통해 안전을 지키지 않고서는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발전을 담보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도록 꾸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안전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가치라는 데 모두가 공감하고,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제 기능과 역할을 해 나갈 때 우리 모두가 염원하는 안전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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