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근로자 김남철 씨

 

3월 25일 인천중앙병원 전통공예실. 긴 작업대 위에 놓여 진 한 도자기를 두고 여러 산재근로자들의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선이 고울까”, “표면에 모난 곳 하나 없네” 등 연신 칭찬이 끊이질 않는다. 이런 쏟아지는 칭찬에 도자기 주인 김남철(53)씨는 밝은 웃음으로 화답한다.

아픔을 잠시나마 잊어보자며 도자기 공예를 배운지 어느덧 2년. 이제 그에게 도자기 공예는 다른 산재근로자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매개체이자 행복의 근원이 됐다. 이처럼 도공예를 통해 산재의 암흑을 걷어내고 웃음을 되찾아가고 있는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사고는 방심을 파고든다

지금으로부터 4년여 전. 김남철씨는 A기계제조업체의 평택공장에서 산업용 기계를 만드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경력 20년의 근로자로, 쇠만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을 것이란 평을 듣던 베테랑이었다.

하지만 그는 공장 내에서만은 항상 초보자같이 조심스럽게 작업에 임했다. 주로 하는 일이 폭발의 위험성이 큰 용접작업이다 보니 잠시라도 주의를 놓쳐선 안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안전화와 안전모, 각반 등의 안전장구를 빠짐없이 착용하고 작업에 임했다. 이처럼 안전을 우선했기에 사고는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믿었던 그였다.

2006년 5월 14일, 그는 터닝롤러 위에 7톤 무게의 쇳덩어리를 올려 놓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참 작업을 하다 쇠의 위치를 바꾸기 위해 롤러의 스위치를 찾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살피던 중 그는 바닥에 떨어져있는 스위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스위치를 집고 허리를 피는 순간, 롤러 위에 놓여있던 쇳덩어리가 그에게 떨어졌다. 7톤에 달하는 무게로 인해 롤러 위에서 쉿덩어리가 조금씩 기울어지다 결국 떨어지고 만 것이다.

“2초가 운명을 갈랐다”

사람이 들 수 없는 무게의 쇳덩어리기에 크레인을 이용해 치웠다. 쇳덩어리가 치워진 후 드러난 그의 몸은 처참했다. 안전화는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짓이겨졌고, 온 몸은 피투성이였다.

급히 실려 간 병원에서의 첫 진단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갈비뼈 4대가 부서지고, 오른쪽 어깨와 왼쪽 발목은 파열 됐다. 또 오른쪽 다리 역시 심하게 부서져 회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머리를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후 2년여간 20여 차례의 수술이 계속됐지만 그의 몸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진통제를 먹지 않으면 잠시도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고통이 계속됐다. 특히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가스를 사용하는 용접 등 위험한 작업이 많다 보니 늘 안전에 유의했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사고가 났어요. 그것도 눈 깜짝할 새에 말이지요. 정말 2초만에 제 운명이 갈렸습니다. 그 순간만 주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떠나질 않아 늘 괴로웠습니다”

그래도 희망은 계속된다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삶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의 곁에는 그의 짜증과 화를 묵묵히 받아주며 병간호를 해준 아내와 사랑스런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는 희망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루빨리 두발로 일어서 아내와 자식들에게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을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물리치료와 재활치료에 매진했으며, 심리치료 차원에서 도자기 공예도 배웠다.

특히 도자기 공예는 그에게 큰 도움을 줬다. 늘 진통제를 달고 살았던 그였지만 공예를 할 때만은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산재근로자들과 어울릴 수 있어 위안도 얻을 수 있었다.

아울러 수년간 공예를 하다 보니 손의 움직임도 상당히 좋아졌다. 이런 장점을 직접 느끼다 보니 그는 다른 환자들에게도 도자기 공예 등의 특수재활치료요법을 널리 알리고 있다.

“많은 산재근로자분들이 자신은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 지 되묻고 싶습니다. 생이 다하지 않았다면 희망은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그 희망을 찾고 키워나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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