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용 한국산업보건학회 회장

 


개별기업에게 책임 묻는 방식 아닌 사회적 부조방식을 확대해야


지난 7월 23일,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이하 조정위)가 최종 조정권고안(이하 조정안)을 발표하였다.

조정안은 그 동안 당사자간 핵심쟁점으로 논의되어 온 ‘보상, 대책 그리고 사과’의 3대 과제를 제3의 사회적 기구인 공익법인을 설립하여 해결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또 ‘보상’의 원칙과 기준을 마련한 다음, 그 원칙과 기준에 따라 대상 질환을 1, 2, 3군으로 구분하여 보상하는 안을 제안하였다. 보상액은 기존의 산재보상 수준을 바탕으로 각 질병군에 따라 적정 보상액을 산출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재발방지 및 향후 사업장관리의 ‘대책’으로는 먼저 삼성전자 내부의 안전보건 관리시스템을 강화하도록 권고하였고, 공익법인의 옴부즈맨 제도를 통한 제3자 확인시스템을 제안하였다.

우리 한국산업보건학회는 우리나라 산업보건의 책임 있는 학술단체로서 이번 조정안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지난 2014년 11월 삼성전자, 가족대책위 그리고 반올림이 제3의 조정위원회를 통한 사회적 합의를 모색하기로 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삼성전자 반도체의 백혈병 논란에서 보듯이 근로자에게 발병하는 질환은 현재의 자료와 과학적 방법론으로 직업관련성 및 업무연관성을 증명하거나 반증하는 것은 일정한 한계가 있다. 더구나 암이나 희귀질환 등은 잠복기가 길거나 낮은 농도에서 양-반응관계가 뚜렷하지 않고, 질병 발생도 확률론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역학조사와 같은 방식으로는 직업관련성 및 업무연관성을 밝히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기존과 같은 방식으로는 직무연관성을 주장하는 측이나 반박하는 측이 모두 수긍할 수 있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삼성전자와 가족대책위 및 반올림이 제3자인 조정위에게 사회적인 조정안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한 것은 기존의 접근방식으로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서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사회적 합의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울러 산업보건의 문제, 특히 보상과 관련된 문제해결 방식을 기존의 배타적 논쟁에서 탈피하여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도 높이 살만하다.

둘째, 사회적 합의를 위한 조정안을 만들기 위해 그동안 헌신적으로 봉사한 조정위에 감사를 드린다.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사안에 대해 이해당사자는 물론 전문가와, 나아가 사회가 수긍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안을 만드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어려운 일이다. 또한 최종안이 도출될 때까지 조정위를 믿고 끝까지 기다려 준 삼성전자와 가족대책위 및 반올림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셋째, 이제 삼성전자와 가족대책위 그리고 반올림은 작년 11월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작은 것에 연연하여 그동안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큰 틀에서 조정안에 동의가 된다면, 조금씩 양보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주기를 간곡히 요청한다.

넷째, 우리 한국산업보건학회가 조정안을 전향적이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권고하는 것은 단지 작년 11월 조정대상자들이 조정위에서 합의안을 만드는 것에 합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조정위에서 제시한, 공익단체를 통한 보상과 내부 안전보건관리 강화 및 제3자에 의한 객관적인 확인시스템 운영 등의 재발방지 방안이 지금까지의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 삼성전자가 지속가능한 경영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으로 나아가는 초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학회는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 산재보상보험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편할 것을 제안한다. 이번 조정안은 사회적 합의라는 형식을 통해, 그동안 사각지대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직업관련성에 논란이 있는 질환의 치료와 보상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그러나 이번과 같이 피해자들이 기업과 협상 및 타협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방식은 우리나라 직업관련성 질환의 치료 및 보상 문제를 해결하는 일반적인 모델이 될 수는 없다.

피해자들이 개별 기업과 일일이 사회적 합의안을 만들어낼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산재보상제도는 대기업이든 영세소기업이든, 원청이든 하청이든 또는 협력업체든 일하다 다치거나 병든 사람들이 적절한 치료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국가차원에서 정비되어야 한다.

직업관련성 질환은 본질적으로 인과관계가 불분명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최근에는 일하는 장소나 고용관계가 수시로 바뀌거나 복잡해지고 있다. 파견, 일용, 임시와 같은 비정규직과 협력업체도 급증하고 있다. 따라서 과거 전통적인 제조업 중심의 직업병 모델에 기반한 산재보상제도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

직업관련성 질환에 대해서는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치료와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피해근로자 구제를 강화하는 한편, 개별기업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이 아닌 사회적 부조방식을 확대하여 개별 기업의 부담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산재보상보험제도 개선을 서둘러야 한다. 이제는 국가가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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