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서진모

KISA 50年史, 줄거리가 될 스토리 ⑬

IMF로 전 국민들과 산업체가 몸살 앓았던 시기
그래도 우리 안전업무는 쉬지 않고 최선을 다해 큰 성과

IMF 경제위기 및 여러가지 사건사고

우리나라는 1997 12월부터 2000년 8월까지 IMF 사태라는 초유의 경제 위기를 맞게 된다. 급격한 외환부족 현상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그해 12월부터 2000년 8월까지 국제금융기관의 원조를 받는 암흑의 시기를 보내게 된 것이다.

대기업의 연쇄부도와 청산, 중소기업의 도산, 대외신뢰도 하락 등 여러 어려움 속에 대량실업과 명예퇴직 등 그동안 겪지 못했던 매우 큰 한파가 우리나라 사회 전반에 찾아왔다. 이에 대해 1998년 2월 4일 김영삼 대통령은 외환위기의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1998년 2월 25일에는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가 마무리 되고, 제15대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게 된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의 정부를 표방하고, 그해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제2의 건국’을 제창한다.

1998년 10월말 당시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실업자는 총 153만 6천여명이며 실업률은 7.1%에 달했다. 이러한 경제상황 속에 일부 대기업들의 경영체제에 큰 변화가 있게 된다.


1999년 1월 6일 LG그룹은 LG 반도체의 모든 지분을 현대전자에 양도할 것을 발표했고, 2월 11일에는 신동아그룹의 최순영 회장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최 회장을 구명하기 위해 그의 부인이 고위층 인사의 부인들에게 ‘옷로비’를 했다는 의혹이 있었는데, 그와 관련해 12월 5일 김태정 검찰총장이 구속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99년 9월 6일에는 대우그룹이 해체되어 대우중공업과 대우전자, 대우통신에 대한 은행관리가 시작되었으며, 11월 25일에는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퇴진할 것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남북관계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1998년 6월 16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 500마리를 실은 트럭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했다. 그해 8월 4일 현대그룹은 북한과 금강산유람선 관광사업을 위한 합영회사 설립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하지만 그해 8월 31일에는 북한이 장거리 로켓인 대포동 1호(일명 백두산 1호, 광명성 1호 탑재)를 발사하고, 1999년 6월 15일에는 연평도 근해에서 북한의 경비정과 꽃게잡이 어선들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하여 우리 함정에 기관포로 선제사격을 가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한국전쟁이후 남북간의 첫 해군교전(연평해전)이 발생하기도 했다.

산업재해 현황

IMF 사태가 안전분야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무엇보다 사업장의 비용절감 방안에 따라 안전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대폭 줄어들었다. 근로자들의 안전과 건강을 챙기는 것보다는 기업을 어떻게든 유지시키려는 분위기가 만연했던 것이 당시 모습이었다. 또한 IMF가 터지기 직전 ‘기업활동규제완화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시행되어 안전에 대한 여러 조건이 완화된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산업재해 외에도 1999년 6월 30일 경기도 화성의 씨랜드청소년 수련원에서 화재사고가 발생하여 유치원생 및 인솔교사 23명이 사망하고 5명이 중경상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해 10월 30일에는 인천의 한 호프집에서의 화재로 57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대한산업안전협회 활동사항
사업의 추진

IMF로 인해 협회의 사업운영에도 막대한 피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안전에 대한 투자 자체가 줄어들다보니 회원사업은 물론, 안전관리업무위탁사업, 안전진단, 교육 등 전분야 사업에 있어서 매우 큰 타격이 예상됐었다.

하지만 협회는 IMF특별대책을 내놓으면서 IMF에 따른 여러 어려움을 하나하나씩 해결해나갔다. 협회의 이 IMF특별대책은 전 사업별로 마련됐으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회원사업의 경우 회원분담관리제 정착, 회원관리를 위한 전산프로그램 개발, 회원의 등급별 관리, 회원전담관리자 운영, 회원에 대한 포상기회 확대, 개인별 신규회원확보 목표관리 등의 회원활성화 및 우대정책을 적극 펼치면서 회원의 이탈을 최대한 방지했다.

교육사업의 경우 교육에 대한 참여를 늘리기 위해 교육과목과 교육과정을 철저히 수요자 니즈에 맞게 편성했다. 또 지회별로 기업의 현실에 맞는 전문성있는 교육을 시행해나가는 한편, 최신의 교육자료 및 교육기자재 확보에도 주력했다. 모든 교육관련 데이터를 전산화하면서 체계적인 관리에 들어간 것도 이때부터다.

안전관리업무위탁 사업의 경우 기본적으로는 자율안전관리능력 배양에 중점을 둔 가운데 보다 공격적인 사업장 확보 체계로 전환했다. 그리고 담당직원들에 대한 각종 교육을 강화하고, 현실에 맞는 업무장비를 지속적으로 확충해나가는 등 안전관리업무위탁 사업의 질적 향상도 꾀하게 된다.

이러한 특별대책과 함께 협회 인원을 1996년 720명에서 1999년 450명까지 감축하고, 축소 또는 재조정해도 특별한 어려움이 없는 부서와 기구는 통폐합하는 등 조직체계도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개편한다.

협회 직원 개개인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자체적으로 필요경비를 최소화하면서 사업 활성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직원 한 명이 한 발 더 뛰어 한 개 사업장을 더 관리한다는 내용의 ‘1·1·1 운동’은 그 당시 직원들의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위의 노력들로 인해 협회는 IMF 한파를 어느정도 피해갈 수 있었다. 물론 세부사업별로 볼 때 큰 타격을 받은 사업도 분명 존재했지만, 회원사업, 교육, 안전관리업무위탁, 건설기술지도 등 당시 협회 사업의 밑거름이 되는 사업들의 피해는 최소화됐다. 사업실적이 크게 떨어진 사업들도 다시금 제 모습을 찾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IMF는 당시 협회에 많은 어려움을 주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회사와 직원들이 힘과 지혜를 모아 어려움을 헤쳐나간 그 모습이 장기적으로 협회의 발전에 있어 큰 원동력이 됐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규사업의 운영

협회는 1998년 4월 6일 지정검사기관으로 지정받아 현재의 안전검사 및 안전인증 사업의 모태가 되는 자체검사 사업을 본격적으로 실시했다.

그리고 정부는 1996년 부족했던 안전경영마인드를 전국 현장에 보급하고자 기업의 안전보건관리 수준을 종합평가하는 ‘안전경영 초일류기업 인증제’ 사업을 야심차게 추진하는데, 협회는 1996년 12월 4일 ‘초일류기업 인증제’를 위한 안전경영진단평가기관으로 지정되어 1997년부터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

제도 도입 당시 평가기관으로 비영리법인만 참여 가능했다는 점에서 볼 때 협회는 이 사업으로 비영리공익기관으로서의 신뢰성과 공신력을 높이고, 전문안전기술 집약단체로서의 위상도 한 층 강화할 수 있었다.

협회는 1997년 4월 24일 미국의 대표 안전기업인 듀폰사와 업무협정을 공식 체결하면서 듀폰의 STOP(Safety Training Observation Program, 안전교육관찰프로그램) 도입을 독점적으로 추진한다. 이 협약을 계기로 협회는 STOP 전문강사요원을 선발해 듀폰에 위탁교육을 실시하고, STOP와 관련한 교재 및 비디오테이프를 한국어판으로 제작해 국내에 보급한다. STOP기법 교육과정도 1997년에 개설, 여천석유화학 안전협의회 관계자 49명을 대상으로 최초로 교육을 실시한 후 전국에 교육을 확대·시행한다.

 


국무총리 표창 수상

한편, 협회는 안전문화 확산에 기여한 성과들을 인정받아 2000년 3월 20일 당시 박태준 국무총리로부터 재난재해예방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단체표창을 수상하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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