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A 50年史, 줄거리가 될 스토리 ⑩

 


이번 특집에서는 우리 정치기류와 국내 노동운동 문제를 다루어 보았다. 노태우 정부 때 발생했던 대규모 노사분쟁은 산업안전 역사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고 산업발전에도 난관이 많았다. 그러나 그 때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세계 G20 국가로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회고하는 것이다. <편집자>

노동자의 빈곤화를 불러온 부의 편재

1980년대 한국자본주의는 대외종속의 심화와 독점의 강화가 특징이다. 이는 부의 편재와 경제잉여의 해외유출을 가져오게 되었고 노동자의 빈곤화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 자본의 축적을 위한 자본가 측의 논리 관철은 노동자에 대한 저임금, 장시간노동, 상대적 과잉인구의 존재와 고용형태의 불안정, 노동복지의 빈곤을 고착화시켰으며 또한 국가 권력을 매개로 한 노동통제 및 지배가 강화되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하여 정치적으로 대중들이 원하고 갈망하는 민주화운동과 함께 열악한 조건에서 참고 일하며 국가 경제력을 키우는 데 일조했던 노동자들이 생계유지와 기본적인 생존권 쟁취를 위해서 한 목소리로 정부와 해당 기업에 건의를 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의 대표적인 노동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1987년 여름 전국을 뒤흔든 이 외침은 그동안 한낱 기계의 부속품으로밖에 취급되지 않았던 노동자들의 ‘인간선언’이었다. 1987년 6·29선언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이 본래 모습을 되찾고 폭발적으로 신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우리나라 노사현장은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3년간 7,000여 건에 이르는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이는 한국에서 임금노동자가 생긴 이래 가장 대규모적인 자본·노동 간의 모순 표출이었다. 전국적이고 전 산업적인 노사분규는 노사관계상의 단순한 분쟁이 아니라 노동자의 대중적 항쟁이었다.

불붙은 노동자 대투쟁

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전국, 전 산업에 걸쳐 동시다발로 폭발한 ‘사실상의 전국 총파업’이었고 파업이 파업을 낳으면서 들불처럼 번져간 ‘자연발생적 투쟁’이었다. 이 투쟁으로 전국 1,300여 개 사업장에 신규 노동조합이 건설됐다.

불은 7월 5일 울산의 현대엔진에서 처음 붙었다. 회사 측의 서류 탈취와 어용노조 결성에 맞서 투쟁했으며,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 등 현대그룹으로 투쟁은 확산되었고, 8월에 현대그룹노조협의회를 결성하고 8월 중순에는 현대그룹 6개 사업장 4만 노동자들이 중장비로 무장한 대규모 가두시위와 행진으로 최루탄 난사로 대응하던 경찰을 무력화시켰다.

7월 중순 부산, 마산, 창원 등 남부지방에서 시작하여 전국과 전 산업으로 투쟁이 파급되었다. 처음에는 놀라기만 했던 정부는 그해 8월 말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의 장례를 무력으로 해산시키면서, 본격적으로 탄압에 들어갔다. 9월 들어 언론의 이념 공세와 파업 농성장 경찰력 투입으로 농성장을 해산하고 구속시키는 등 대대적인 진압공세를 펼쳤다.

■7~9월 노동자 대투쟁의 특징
1987년 6월 29일부터 9월 13일까지 쟁의건수가 총 3,241건(하루 44건)으로 80년 봄에 비하면 6배에 달하고, 이 중 제조업이 1,796건에 달했다. 그리고 전 산업, 전 지역에 걸쳐서 파업과 농성, 가두시위가 동시다발로 전개되었다. 6월 29일 이후 노조가 1,162개 결성되어 그 전보다 노조 수가 40%로 증가하였다.

투쟁 내용이 민주노조 건설, 어용노조 민주화, 임금인상, 노조건설, 근로조건 개선으로 집약되었다. 노동악법을 노동자의 단결된 힘으로 돌파해나갔다. 거의 모든 사업장에서 쟁의발생 신고나 냉각기간을 무시하고 현장을 점거한 후 파업농성에 돌입했으며 가두시위와 행진이 일반화되었다.

지역·업종을 넘어 전국으로, 중화학 대기업 남성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경공업, 중소기업, 여성노동자 사업장으로 확산되어 갔다. 또 투쟁의 주체가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대중이 되어갔다.

■노동자 대투쟁의 의의와 한계

80년대 말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노동운동사상 획기적인 것으로 이후 노동운동의 주요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를 단련시키고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켰고 노동자가 스스로 투쟁의 전면에 나섬으로써 자신들을 억압하는 체제와 각종 제도의 구조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노동자들은 노동자 간 자신들의 힘과 단결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사회적 열등감이나 패배주의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 조직적 지도력의 중요성과 연대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실제로 많은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이 조직되었고 조직적인 연대를 구축해나갔다.

하지만 경제주의적 개량주의 경향이 극복되지 못했다는 점과 투쟁조직의 지도력이 약하여 강고한 투쟁을 벌이고도 그것이 광범위한 조직적 역량으로 결집되지 못했다는 점은 한계로 남았다.

88년~90년대 초 노동운동

이렇듯 노동자 대투쟁 이후 조직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질적인 전환을 이룬 노동운동은 1988년 들어서는 지하철노조, 대우조선노조, 철도 기관사들이 파업을 벌였고, 여름에는 MBC노조가 방송사상 첫 파업에 돌입했다. 자연발생적인 투쟁열기도 식지 않아 1988년 총 1,873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아울러 사무금융노련, 언론노련, 병원노련, 전국교직원노조 등 업종 노동조합이 대대적으로 결성되었다. 한편 대기업 노조는 그룹 차원으로 뭉쳤다.

‘88올림픽’과 ‘5공 청문회’를 통해 보수야당을 견인해 내고 지배세력 내의 갈등을 봉합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노태우 정권은 88년 10월 무노동 무임금지침, 12월 민생치안에 관한 특별지시(사업장내공권력 투입), 89년 10월 산업평화 조기정착화를 위한 관계기관대책회의라는 직접적인 물리적 탄압을 시작했다. 대표적인 탄압이 88년 말 안강의 풍산금속, 89년 1월초 울산 현대중공업의 경찰력 투입을 통한 폭압적 진압이다. 소위 ‘공안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1990년 상반기, 총자본진영의 집중적인 탄압과 이데올로기 공세로 노동운동전선은 일시적으로 침체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점자본의 부동산 투기로 인한 전세·월세의 폭등, 물가 불안, 증시 폭락 등으로 민자당과 독점자본에 대한 노동자·민중들의 분노는 용암처럼 들끓었다.

노동운동전선의 일시적인 침체를 돌파하고, 노동자·민중들의 분노에 불을 지핀 것은 1990년 4월, KBS 노동자들의 방송민주화투쟁과 뒤이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 점거 농성투쟁이었다. 90년은 그동안 세운 조직력을 토대로 정부와 자본의 총체적 탄압에도 줄기차고 끈기 있게 임금인상, 노동법개정, 노동운동 탄압에 대항하는 투쟁을 이어갔다.

민정, 민주, 공화 3당 합당을 선언했던 1990년 1월 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노협)가 결성됐다. 그리고 전체 노동자의 40%를 차지하는 전문기술, 사무직 노동조합연맹도 ‘전국 업종노동조합회의’를 통해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였다.

1991년에는 소위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제2공안 통치 속에서 ‘수서 비리 은폐정권 규탄 국민대회’, ‘세계노동절 102주년 기념대회’, ‘강경대 폭행치사 규탄투쟁’을 비롯, ‘박창수 위원장 옥중 살인 규탄 및 원진레이온 직업병 살인규탄 대회’등 대규모 투쟁이 있었다.

1991년 5~6월 투쟁의 성과로 1991년 10월, 전노협과 업종회의, 노동운동단체가 결합한 ‘ILO기본조약 비준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 공동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노동자들은 정권의 탄압과 언론의 공세 속에서도 힘차게 나아갔다. 그 시절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힘겨운 노동자들의 노력을 발판 삼아 성장한 바위를 뚫어내는 노동자들의 땀방울이 살아 있어 산업현장은 오늘도 쉼 없이 발전해가고 있다.
저작권자 © 안전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