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A 50年史, 줄거리가 될 스토리 ⑦

 


그 와중에도 ‘대한산업안전협회’ 역사는 서서히 발전 

1980년 4월 14일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하였고 4월 21일에는 강원도 정선 사북읍의 광부들이 임금 인상액과 어용노조에 대한 불만을 이유로 시위를 벌이던 중 경찰과 충돌하여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는데 이를 ‘사북사태’라고 칭한다.

그 때의 상황을 잠시 되돌아 보자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약 3천5백여명의 광부와 그 가족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던 광산촌이 일시에 무법천지로 변모했다. 장기간에 걸쳐 지속돼온 노사간의 불협화음과 어용노조에 대한 불신이 응어리져 있던 사북읍 동원탄좌(대표 이연) 사북광업소 소속 광부들은 마침내 80년 4월 그들의 응어리를 무력으로 풀려는 힘의 시위에 나섰다.

사건의 발단은 79년 12월 사북광업소 광산노조지부 측이 회사 측에 임금 42% 인상을 요구했으나 회사 측이 이를 묵살, 임금 인상을 지연시켜 오다 4월 15일 노조지부장 이재기씨가 단독으로 회사 측과 임금 20% 인상에 합의한 사실이 전해지면서 비롯됐다.

광부들의 주장은 무시된 채 노조와 회사 측이 임금 인상을 합의하자 광부 30여명은 이튿날인 16일 노조사무실로 찾아가 지부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광부들의 농성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18일까지 3일간을 계속 되다 불법집회라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해산을 종용 당했고 19일에는 계엄분소에 집회 신청을 했으나 이 역시 기각당했다. 이에 격분한 광부들은 경찰의 해산 종용에도 아랑곳없이 농성을 이어갔고 21일에는 그 인원이 무려 7백여명으로 늘어났다.

소폭적인 임금 인상과 어용노조에 대한 불신이 봇물처럼 터진 광부들은 21일 하오 1시부터 광업소 건물에 모여 노조 총회를 열자는 구호를 외치며 아슬아슬한 국면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 현장에 출동, 이들의 시위를 말리던 경찰병력 중 광부들의 동정을 살피던 정선경찰서 정보과 형사 1명이 광부들과 입씨름을 벌이다가 흥분한 광부들을 피해 경찰 지프를 타고 달아나다 차에 매달리던 광부 2명에게 중상을 입히면서 목소리만 높아가던 시위장은 갑자기 무법천지의 폭력장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광부의 부상 소식은 경찰이 고의로 광부를 쳤다는 말로 비화되어 전해졌고 이에 자극 받은 50여명의 광부들은 대책회의장에 난입, 책상 등 기물을 닥치는 대로 부수며 폭력을 휘둘렀다. 폭력을 구사하는 광부의 수는 점차 늘어갔고 마침내 5백여명의 대규모로 불어난 시위 광부단은 삽, 도끼 등으로 무장한 채 닥치는 대로 흉기를 휘두르면서 노조 사무실, 정선경찰서 사북지서, 광업소 사무실 등 사북읍 일대를 완전 점거했다.

 


이런 때 산업안전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이를 전후하여 전두환 정권은 무자비한 권력을 휘둘렸으며 전국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비상계엄령 철폐 시위에도 불구하고 5월 17일부로 비상계엄령을 확대하였으며 계엄사령부는 김대중, 문익환 등을 소요 조종 혐의로, 김종필, 이후락 등을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연행하였다.

이에 따라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전국의 대학에 휴교령이 떨어졌다. 5월 24일에는 김재규 등 10·26 사태 관련자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으며 3일 후인 27일에는 광주 시내에 계엄군이 진입하였다.

6월 24일에는 김종필 전 공화당 총재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발표했으며 7월 4일에는 김대중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9월 17일 사형을 선고받는다. 8월 4일에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에서 무시무시한 삼청교육대의 ‘순화교육’ 계획을 발표하였고 8월 13일에는 당시 신민당의 총재였던 김영삼이 모든 공직 사퇴와 정계 은퇴를 발표하였다.

8월 16일에는 최규하가 하야하였고 전군지휘관회의는 8월 21일, 전두환 장군을 국가원수로 추대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때부터 전두환 정권은 이성을 잃어버린듯 했고 그로 인해 산업발전은 물론 산업안전 문제도 우왕좌왕했다.

 


산업안전보건법 제정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기존의 경공업, 중화학공업에다가 기계, 전자와 같은 조립가공 산업까지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산업정책은 시장기구의 활성화를 통한 민간주도 경제운용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민간의 자율화 내지 자유화로 전환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경쟁의 원리를 도입하여 경제활동의 효율성을 높여나가는데 중점을 두게 된다.

이러한 정책 기조 아래 수출규모가 1981년에는 200억 달러, 1985년에는 300억 달러를 달성할 정도로, 경제가 다소 발전하게 되면서 한 때 전두환 정권이 경제를 살렸다는 말도 회자되었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산업재해자도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은성광산, 함태광산, 봉명광산의 각종 사고가 연이어 발생하고, 1981년 5월 14일 경산열차추돌사고(55명 사망, 243명 부상)가 발생하면서 안전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대한산업안전협회의 역사

이러한 상황 속에 1981년 12월 31일 법률 제3532호로 ‘산업안전보건법’을 제정하게 된다. 이 법은 1960년대 제정된 근로안전관리규정 및 근로보건관리규정을 더욱 구체화하고, 산업안전과 관련한 여러 법을 통합 관리하는데 큰 의미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후 시행령, 시행규칙(이상 1982년 제정)과 함께 지금까지 산업재해 예방활동의 근간이 되는 법으로 자리매김해왔으며 또한 정부는 산업안전보건법 제정과 함께 1982년 12월 산재예방업무를 1983년부터 민간에 이양한다는 내용의 ‘재해예방 활동의 민간주도화 방안’을 확정 발표했고, 민간기관의 전문가들이 그동안 근로감독관이 수행해온 각종 산재예방 활동을 벌이도록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사업장의 현실을 보다 잘 알고 있는 민간기관의 산재예방 활동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강화해 사업장의 자율안전을 보다 활성화시키려는 목적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한산업안전협회의 발전
- 협회 조직의 체계화 -

‘산업안전보건법’ 제정과 ‘재해예방 활동의 민간주도화 방안’으로 협회는 큰 발전을 이루게 되고 협회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진 것은 물론, 보다 심층적이고 전문화된 사업수행이 본격화되면서 협회의 전문성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게 됐다.

협회는 대표 재해예방기관의 역할을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수행해나가기 위해 조직 규모를 대폭 확대하고, 조직 체제도 정비해나갔으며 1983년 9월 30일 노동부 장관의 승인된 직제규정에 따라 최초의 직제와 기구를 마련하여 조직을 구성 운영한다.

당시 협회 중앙회의 조직은 회장, 부회장, 감사, 상임이사 등 임원 4인과 분야별 10인 이내의 비상근 또는 상근 전문위원을 두었고 사무국은 2부 10개과로 편성됐음. 지회는 9개 지회로 지회장, 사무국장, 분야별 5인 이내의 전문위원과 2개과를 두었고, 지부는 6개 지부로 지부장과 사무장을 두었다.

직제규정과 함께 1983년 인사, 보수, 1984년 문서관리규정, 복무규정 1985년 위임전결규정, 예산규정 등 조직운영과 관련한 여러 규정과 중앙회 및 지회의 인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조직운영 방침’을 마련하면서, 협회는 대내외적으로 명실상부한 민간 대표 재해예방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게 되었다.

- 종합안전진단기관 지정 -

1980년대 초반까지 회원 및 교육사업 위주로 사업을 수행해왔던 협회는 1983년 7월 25일 노동부로부터 종합안전진단기관으로 지정받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 정부 및 대기업의 요구에 의해 자체적으로 안전진단을 실시했지만, 지정 이후는 지정기관으로써 공식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특히 처음으로 공식지정을 받은 당시인 1983년 노동부 산업안전과의 산재예방 예산에서 9천만원을 무상지원 받아 진단장비를 구입한 바 있는데, 이는 산재예방 예산이 민간단체에 처음 지원된 것으로 우리 산업안전역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 안전문화 활성화 활동 -

1980년대 초중반 협회는 사업수행 외에도 안전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으며 첫째, 산업안전보건 분야의 가장 큰 축제의 장인 산업안전보건대회를 1983년 제16회 대회부터 1988년 제21회 대회까지 협회가 주관해 개최하였다.

한해 동안 안전인들의 노고를 격려하고, 노사정의 산업안전에 대한 역할과 결의를 다지기 위한 행사로, 당시 총리, 부총리, 노동부장관 등 주요 인사들이 자리를 함께할 정도로 그 행사는 성대히 치러졌다.

두 번째로 노동부 및 주요 유관기관, 일본중앙노동재해방지협회 등의 후원을 받아 1983년부터 1988년까지 ‘국제산업재해예방기기 및 보호구전시회(KISS)’를 주관해 개최하였다. 보호구산업을 활성화시키고, 보호구의 중요성을 산업현장에 널리 확산하기 위한 행사였다. 여러 안전기관의 협력 속에 개최된 처음이자 유일했던 국제 안전보건 전시회로서 의미가 매우 컸다.

그밖에 협회는 1984년부터 1988년까지 무재해운동의 기법 중 하나인 위험예지훈련을 확산시키고자 ‘전국위험예지훈련경연대회’를 총 5회 개최했으며, 각 사업장에서 개발하여 추진해온 무재해운동 우수기법을 소개하는 ‘전국안전관리성공사례 발표대회’를 1985년부터 총 4회에 걸쳐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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