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A 50年史, 줄거리가 될 스토리 ④

그 도로 속에는 ‘안전부주의’로 77명의 아까운 목숨 희생

정경유착 이란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70년대 당시 박정희정부와 현대 정주영회장의 합심(合心)은 이 나라 대한민국을 살려낸 참으로 위대한 대 작품(?)들을 창조했다고 봐야한다. 물론 그 속에는 수많은 근로자들 희생의 아픔도 컸지만...

우선 정주영 회장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낸 역사적인 큰 업적 두 가지만 실어두겠다. 먼저, 지극히 빈약했던 우리 조선(造船)사업을 세계인들이 깜짝 놀라도록 발전시킨 일이다.


특히 필자가 당시 직접 승선해본 26만 톤급 유조선 <어틀랜틱. 배런>호 진수식 때 있었던 일화는 내년 ‘50年史’에 상세히 실어내기로 하겠지만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그때 그 업적은 아무튼 대한민국 조선업의 대혁명 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라는 경부고속도로 이야기다.

“여기 이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야말로 피와 땀의 결정이니 무릇 2년 5개월 동안 연인원 890만 명이 땀을 흘렸고 그중에서도 피를 흘려 생명을 바치신 이가 77명이었다. …자손만대 복지사회 건설을 위한 거룩한 초석이 된 것이니 우리 어찌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은혜와 공을 잊을 것이랴…”

이는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부근에 세워진 순직자 위령탑에 노산(鷺山) 이은상 시인이 새겨둔 글이다. 경부고속도로가 2013년인 올해 개통 43주년을 맞았다. 우리 대한산업안전협회(KISA)보다 여섯 살이 어린 편이다.

엄청난 공사금과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피가 배어있는 도로, 초고속 발전을 거듭한 대한민국 근대화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현장이다. 천 리 길이 넘는 구간(428km)에서 2년 5개월간 매일 아침 해가 뜨기 전부터 밤늦게까지 오로지 ‘하면 된다’는 구호를 외치며 그야말로 속도전으로 국가의 기틀을 새로 놓는 도로 공사를 벌이는 동안 30~40대의 젊은 인부들 77명이 목숨을 잃었다.


개통식이 열리던 1970년 7월 7일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현장을 찾아 위령탑 제막식을 거행하며 머리숙여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그후 해마다 7월 초가 되면 순직자 위령탑에선 경부고속도로 건설 공사에서 희생된 77명의 명복을 비는 위령제가 열린다.

대한민국 현대사는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이후 사람·물자·정보의 이동은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게 획기적으로 빨라졌다. 자동차 산업의 비약적 발전은 말할 것도 없으며 동·남해안 산업단지에서 생산한 제품과 자재는 밤새워 새롭게 개통된 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수도권으로 운반됐다. 수도권에 위치한 공장들이 완제품을 만들어 세계 각국으로 수출하던 통로도 이 도로였다.

총공사비는 429억7300만원으로 대략 1km당 1억 원꼴. 시내버스 요금이 10원이던 시절이다. 70년 당시 255달러에 불과하던 1인당 국민소득은 2012년 2만2708달러로 42년 새 약 90배 뛰어올랐다. 77명의 희생과 890만 명의 땀방울이 ‘대 국가발전’을 일궈낸 생생한 입증자료다.

그렇게 개통된 새로운 건설문명은 빛과 그림자를 동반했다. 경부고속도로 이후 국토의 지형이 변화하기 시작했고, 사람과 물자가 서울로 집중되면서 수도권의 과밀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국토의 불균형 발전에 따른 수도권과 비수도권, 영남과 호남의 갈등도 깊어졌다. 70년도에 543만 명이었던 서울인구는 76년 725만 명, 83년 920만 명, 92년 1097만 명으로 급증했다. 그야말로 서울로, 수도권으로 향한 인구집중은 2011년에야 겨우 멈췄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소식을 당시 각 신문들은 1면 머리기사로 다음과 같이 전했다. “경부고속도로는 우리의 기술과 우리의 자금으로 세계에서 가장 빨리 건설했으며 동양에서 가장 긴 도로라는 점에서도 우리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고 평가했다.


앞의 2013년 추석 때 사진의 차량행렬과 같이 개통당시로부터 40여년 만에 통행차량은 수십 배로 늘어났으며 야당과 반정부적 인사들의 적극 반대를 뿌리치고, 고독한 결단을 내린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의 고집스런 ‘조국근대화’ 정책은 아마도 경부고속도로 개통 그날부터 본격적으로 날개를 달았던 것 같다. 그렇다. 조국근대화! 이 5자가 주는 뜻은 참으로 의미심장하였다.

이 대목에서 빼놓을 수 없는 ‘효자재벌기업’ 하나가 있다면 서두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바로 故 정주영 회장이 창업한 현대그룹이라고 봐야한다. 따라서 현대건설이 국내에서 일약 유명한 건설회사로 부상하게 된 배경에는 역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마무리 되면서 우리나라는 수송 화물이 급격히 늘어났고 따라서 효과적인 수송 체계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자동차가 분담해 줘야 할 단거리 수송까지 철도가 감당하고 있었고 그에 따른 수송 난으로 물가고를 부채질하는 것이 경제 성장 저해의 주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더더욱 고속도로의 소중성은 날로 커져갔다.

그럼에도 박정희 대통령이 대 국토개발 사업의 하나로 경부간 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밝히자 항상 있는 일이지만 반대론자와 신중론자가 속출했다. 공화당과 경제부처 장관들은 신중론이었고 야당과 언론과 학계는 반대였다. 경제기획원도 예산 부족을 탓하며 마뜩치 않아 했다. 건설을 하더라도 교통량이 적을 것이라는 내용의 세계은행 보고서 역시 반대 여론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래도 박정희 대통령은 흔들리지 않았다. 대통령은 정부 예산이 국회에 제출된 상황에서도 “전 부처의 예산을 일괄적으로 5%씩 깎아서 고속도로 예산을 지원하라!!”고 지시했다. 그때부터 아마도 박정희대통령은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고속도로 건설 집념 앞에서는 국회의 권위나 행정 절차 따위는 무시당하는 예가 많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포병 병과를 지낸 박정희는 설계도면에 대한 대단한 박식함이 있었으며 혼자서 지도를 봐가면서 노선 결정을 비롯해 용지 매입에까지 지휘봉을 잡았다.

다음은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의 회고담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침실 머리맡에 공사 진척 상황 표를 붙여놓고 매일 전화로 체크해가면서 헬기로, 자동차로, 경호원 없이 혼자서 현장을 돌아보았다…대통령은 고속도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시도 때도 없이 밤중이건 새벽이건 나를 불렀다. 식사도 함께 많이 했고, 막걸리도 많이 마셨다.”

야당의 극한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 인원 890만명을 동원, 대통령은 ‘겨레의 동맥’이라 불리는 경부고속도로를 착공 2년 반만에 완공, 개통시켜 세계를 놀라게 했다. 물론 안전사고도 많았지만 그때부터 ‘조국 근대화’와 ‘한강의 기적’ 바람은 거세게 불었다.

이렇게 해서 서울―부산 간의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됐다. 소요 비용은 429억 원으로 일본 도메이(東明)고속도로 건설비의 8분의1이었다. 부실공사라고 욕을 많이 먹었지만 그 때 당시의 나라 경제여건에서는 건설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애초부터 개통 후 보수를 각오한 공사였으니 사실 부실이 드러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선 개통, 후 보수였다.

부실공사는 또 그렇다 치더라도 이때만 해도 안전무시정신과 안전 불감증이 심각하던 때라 여기저기서 산업재해 사고가 많이 발생하였다. 하루에도 여러 명이 죽고 많게는 10여명이상이 한꺼번에 몰사 하기도한 그때는 대한산업안전협회도 여러 가지로 여건이 좋지 않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때 만일 지금의 대한산업안전협회의 건설안전본부나 교육본부 같은 탁월한 기구가 있었다면 아마도 희생자는 절반이상으로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따르기도 한다.

당시 산업현장의 인명사고 소식을 자주 보고받자 평소 특유의 붓글씨로 휘호를 많이 쓴 박정희대통령은 모든 산업체와 국민들에게 ‘안전’을 강조하면서 1972년 설날아침에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대필(大筆)의 사자성어(육필휘호)를 써내어 안전에 따른 국민정신계몽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그런 면에서 당시 박대통령은 언제나 백성들의 생활안전에 만전을 기했던 세종대왕 같은 대통령으로 평가 받을만하다.

 


한편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우리나라의 산업구조는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 급변하게 된다. 그에 따라 산재사고가 크게 증가한 것은 물론, 사고유형도 다양화 대형화 됐다. 또 각종 사회기반시설의 확충에 따른 건설사고도 급증한다. 이에 산업안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했다.

당시 다양화된 위험요인 속에 재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민간기관의 활성화가 급선무였다. 실제 위험을 경험하고 있는 사업장 관계자와 민간전문가들이 폭넓게 참여하면서 사업장의 안전을 이끌어가는 체계가 급변하는 산업현장의 현실 속에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노동청(현, 고용노동부)에서는 이를 충분히 공감했다. 그리고 안전 분야 민간기관으로서는 유일했던 ‘대한산업안전본부’의 확대 개편을 적극 지원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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