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중 관장 광나루 안전체험관

1997년 개봉된 타이타닉. 그 무렵 극장을 찾아 관람했던 필자는 이 영화를 통해 안전에 대한 방심이 얼마나 큰 사고로 이어지는지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1912년 4월 10일 낮 12시15분 영국 사우샘프턴항을 출항한 타이타닉호는 다음날 아일랜드의 퀸스타운에 정박해 승객을 더 태운 후 뉴욕으로 첫 항해를 시작했다. 월터 로드가 쓴 타이타닉호의 비극에 따르면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은 총 2206명으로, 이 중 구조된 사람은 703명뿐이었다.

타이타닉호는 5만2000t, 268m의 길이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선박이었다. 배 안에는 호화객실과 고급 레스토랑 등 없는 것이 없었다. ‘떠다니는 궁전’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했다.

선장경력 26년의 에드워드 스미스는 타이타닉호의 첫 항해가 끝나면 은퇴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그는 도착예정일인 17일보다 하루 일찍 뉴욕에 도착해 승객들을 놀라게 하고, 자신의 은퇴와 배의 첫 출항을 멋지게 장식할 요량으로 23노트의 빠른 항해를 명령했다. 그리고 출항당일 북대서양에 빙산이 떠다닌다는 전문을 6통이나 받았지만 평소 자주 있던 일로 치부해 버렸다. 주위의 다른 선박들이 보낸 경고무전은 바쁘다는 핑계로 무시했다.

14일 밤 망루에 있던 어느 한 무리의 사람들은 거대한 빙산을 발견하고 놀랐다. 다급하게 알렸지만 그 거대한 배의 속도를 늦추기엔 너무 늦었다. 결국 그날 밤 11시40분쯤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타이타닉호는 빙산과 비끼듯 충돌하고 말았다.

최첨단 기술이 동원되고 갖가지 안전시스템을 갖췄기에 ‘불침선’(不沈船)으로 불렸던 타이타닉호. 배 밑의 수밀격실이 4개까지 물에 차도 침몰하지 않도록 설계됐으나, 빙산과 충돌하면서 5개의 수밀격실에 바닷물이 들이닥쳐 버렸다. 결코 침몰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타이타닉호는 충돌 후 2시간40분 만인 15일 새벽 2시20분에 선체가 두동강 나면서 4,000m 깊이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침몰 원인을 두고 전문가들은 무수한 가설을 제시했다. 올슨은 강력한 밀물과 썰물로 인해 그린란드의 빙하에서 떼어진 빙산들이 해류를 타고 천천히 남하, 타이타닉호의 항로에 끼어들었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원인 외에도 타이타닉호의 침몰사고는 기본적으로 안전항해 수칙을 지키지 않았기에 발생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무엇이던지 완벽할 수는 없고, 안전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져 완벽하다는 타이타닉호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배가 위험해역에서 너무 빨리 항해했다는 사실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또 타이타닉호가 당시 영국 기선 캘리포니안호처럼 야간 운항을 중단했다면 조류나 신기루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고 당일 14일 오전에는 원래 해상사고가 날 것을 대비해 구명보트 타는 연습을 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선장은 승객들의 불편을 이유로 연습을 취소시켰다고 한다. 타이타닉호에 준비된 구명보트 등에는 모두 1,178명이 탈 수 있었지만 구조된 사람은 703명 뿐이었다. 정작 구명보트의 자리는 적잖게 비어있었던 것이다. 그 때 시간에 맞춰 해상사고에 대비한 연습만 철저히 했었더라면 그 피해는 분명 최소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타이타닉호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최악의 사고를 가정하여 운항을 했어야만 했지만, 신도 침몰시킬 수 없다는 자만에 사로잡혀 그러하지 못했다. 결국 역사상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낸 것은 빙산이 아닌 바로 사람의 방심이라고 할 수 있다.

위기는 항상 가장 크고, 튼튼하고, 견고한 것이라고 믿었던 것에 덮치기 마련이다. 거기에는 자만이라는 싹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100년 전 타이타닉호의 비극을 떠올리며 자만의 빈틈을 스스로가 메워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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