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산업안전보건 기능 지방이양 결정이 무서운 후폭풍을 불러오고 있다. 노동계를 중심으로 일기 시작하던 우려의 목소리가 이제는 사태를 예의주시하던 관련 단체들에까지 퍼졌다. 설마하던 우려가 점차 기정사실화 되자 산업안전보건관련단체들이 뜻을 한데 모으고 본격적인 대응에 나서기 시작했다.

대응은 지난 15일 국회에서 시작됐다. 이날 국회에서 열린 지방이양 관련 토론회에는 안전관련 학회·학계·연구소, 국회의원, 양대노총 등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분야의 구성원 대표들이 대거 모였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산업안전보건 기능 지방이양 결정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향후 대응방안을 논의했다.

다음은 이날 각 단체와 토론에 참석한 산·학·연 전문가들이 내놓은 의견을 종합한 것이다.



 


이번 토론회는 지방분권촉진위원회의 산업안전보건 기능 지방이양 결정에 대한 문제점과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이 자리에는 좀처럼 한 곳에서 보기 힘든 대한산업보건협회, 대한산업안전협회, 한국산업간호협회, 한국특수건강진단협회, 한국작업환경관리협회, 대한산업의학회, 한국안전학회, 한국산업위생학회, 한국산업간호학회 등 국내 대표 산업안전보건단체 모두가 모였다. 여기에 더해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사업주 단체와 노동부 등 정부인사도 대거 참석했다.

금번 산업안전보건 기능 지방이양 결정이 국내 산업안전보건분야에 끼친 파장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토론을 주최한 강성천 의원은 “현실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내린 정부의 결정은 근로자의 생명과 직결된 산업안전보건체계를 무너뜨릴 것”이라며 “이제라도 정부가 산업안전보건분야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관계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한 대책을 세워야한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토론회에는 각 단체의 대표자들이 나섰다. 한국노총 조기홍 국장, 민주노총 김은기 국장, 경총 임우택 팀장, 대한산업의학회 원종욱 교수, 한국안전학회 정재희 교수, 한국산업위생학회 최상준 교수, 노동부 김양현 과장 등이 이날 토론자였다.

토론자들이 지방이양과 관련해 이날 제기한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 ILO 협약 위반

토론자들은 산업안전보건의 지방이양은 1992년과 2008년에 우리나라가 비준한 ILO(국제노동기구) 협약을 위반한 것이라고 일제히 성토했다.

우리나라는 1992년 근로감독업무는 국가 중앙부처에서 담당하도록 하는 내용의 ILO협약 제81조를 맺었으며, 2008년에는 국가가 산재예방을 위한 안전보건정책을 수립·시행할 때는 노·사 단체와 협의하도록 하는 내용의 제155조와 제187조를 비준한 바 있다.

한국노총 조기홍 국장은 “근로자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를 다루며 노사의견과 산업안전보건 전문가를 배재한 채 논의를 한 것은 명백한 협약 위반”이라며 “시정되지 않을 시 국제노동기구에 제소하겠다”고 말했다.

또 민주노총 김은기 국장은 “근로감독사무를 지방으로 이양한다면 개별 행정주체가 다른 기준을 적용하거나 행정해석상 차이를 보이는 일이 발생하는 등 대혼란이 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 지자체 산업안전보건 업무 감당도 못해

전문성도 없고 여건도 되지 않는 지자체에 산업안전보건 기능을 이양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나왔다. 토론자들은 산업안전업무는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사무인데 현재 지자체에는 관련 업무에 대한 전문성은 커녕 인프라도 구축되지 못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 중앙정부로부터 산업안전보건업무를 이양 받는다면 산업현장 전반에 혼란이 일 것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경총 임우택 팀장은 “산업안전보건의 특수성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지방이양이 이루어지고 있다”라며 “지자체가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전문성이 확보가 된 다음에야 지방이양을 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지방이양은 곧 규제완화

지방이양이 규제완화를 불러올 것이란 의견도 제기됐다. 기업 유치를 위해 사업주의 눈치를 봐야하는 지방자치단체의 특성상 산업안전보건규제가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

대한산업의학회 원종욱 교수는 “전국의 대다수 도시가 기업하기 좋은 도시를 표방하며 규제완화를 내걸고 있는 상황”이라며 “지방이양은 곧 규제완화로 귀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지자체에서 제도적 노력을 통한 산재감소를 추구하기보다는 산재은폐라는 쉬운 방법을 택하는 상황도 만연할 것”이라는 우려도 덧붙였다.

반면 지방이양이 규제강화를 불러 올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경총 임우택 팀장은 “선거를 의식해야하는 지자체장의 특성상 규제를 강화해 민심에 부응하고자 하는 경향도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 노동부, 비합리부분 걸러질 수 있도록 최선 다할 것

이날 정부를 대표해 참석한 노동부 김양현 과장은 향후 정책결정과정에서 비합리적인 부분이 걸러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노동부의 의사를 전달했다.

김 과장은 “정부의 메커니즘상 부처의 의견이 달라도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따라갈 수밖에 없다”라며 “하지만 토론회 등을 통해 감지한 여론이 정책에 반영이 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또 김 과장은 “이양이 실행되려면 법개정이 이루어지는 등 다양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며 “이 과정에서 실행할 수 없는 사안들은 수정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산업안전 공론화 못한 관련단체 책임도 커

이날 토론회에서는 산업안전보건관련 단체와 전문가부터 자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오게 된 것은 관련 단체 및 전문가들이 산업안전보건분야를 국가 문제로 공론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로 인해 산업안전분야가 기타 안전분야에 비해 소홀한 취급을 받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서울산업대 이영순 교수는 “이양결정업무 중에 산업안전보건업무가 유독 많다는 것은 산업안전을 과소평가하는 정부의 시각을 알 수 있게 한다”라며 “이는 그간 안전하는 사람들이 적극적이지 못했음을 반증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교수는 “지금부터라도 안전인들이 국민 모두가 산업안전보건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안전을 공론화하고 이슈화하려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말했다. 

“산업안전보건은 지방이양 대상도 될 수 없어”

박두용 한성대 교수, 지방이양 결정의 부당성 발표

 

본격적인 토론회에 앞선 주제발표 시간에서 한성대 박두용 교수는 지방이양 결정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발표해 많은 참석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박 교수는 먼저 지방이양 결정조치의 내용상 문제를 지적했다. 산업안전보건 사무는 ▲광역적 기능 ▲전국적 통일성 ▲고도의 전문성 ▲지자체의 인력 수급 어려움 등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 지방이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는 게 박 교수의 설명이다.

때문에 그간 국내에서도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지방이양이나 지방분권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거의 없었다고 박 교수는 덧붙여 설명했다. 또 박교수는 모든 OECD국가들도 산업안전행정기능을 중앙정부에서 다루고 있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이양이 결정된 안전인증 업무나 유해물질의 제조·허가 등의 기능이 통일성, 전문성 등 중앙정부가 수행해야할 요건에 모두 해당된다는 점에서 이번 지양이양 조치는 매우 부당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안전 기본원칙에 위배된다는 점도 부당성으로 들었다. 안전보건을 확보하기 위해선 일관되고 통일된 기준이 필수적인데 각 지자체마다 다른 기준을 세운다면 시장에서 엄청난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로 인해 대형사고의 위험도 높아진다고 박 교수는 덧붙였다.

이와 함께 박 교수는 권한과 책임의 일치 원칙 위배도 지적했다. 안전보건관리의 권한과 책임이 이원화되면 위험관리가 제대로 될 수 없다는 것.

박 교수는 이양될 경우 개정안의 문제점도 각 항목별로 지적했다. 일례로 박 교수는 ‘산업용 위험기계기구의 안전인증’을 들었다. 이양에 따라 지자체별로 다른 기준을 정하게 되면 지역간 차별화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산업용 기계기구를 생산·판매하는 기업에게도 이중삼중의 불편을 초래하게 된다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생산·판매업자가 각 지자체별로 상이한 기준을 충족시켜야 하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 주된 이유다.

한편 이들 부당성에 대한 대응방안으로 박 교수는 단기적 방안과 장기적 방안을 제시했다.

단기적 방안은 국회의원과 보좌관을 직접 설득하는 등 국회를 압박하고 전국적인 반대 서명운동을 펼치자는 것이다. 장기적 방안은 바람직한 산업안전행정 조직체계가 구축될 수 있도록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선해 나가는 추진조직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에 대한 최종 목표로 박 교수는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제시했다.

 

저작권자 © 안전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