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원진산업재해자협회 한창길 위원장

 

약 20여년 전 발생한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CS 2) 중독사태는 오직 생산과 경제만을 생각하던 우리사회에 직업병과 산업재해라는 사회적 의제를 던져주었다. 이를 계기로 작업장 안전의 중요성이 널리 퍼진 것은 물론 직업병을 예방·관리하는 체계가 이 땅에 정립될 수 있는 기반이 생겼다. 또 그 후 각 사업장과 노동단체에는 근로자의 안전과 건강을 다루는 부서가 생겼으며, 전국적으로 안전보건에 관한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가히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큰 변화를 불러왔던 수백명의 원진레이온 근로자들은 아직도 병마와의 기나긴 싸움 속에 있다.
(사)원진산업재해자협회 한창길 위원장을 만나 산재의 심각성과 향후 안전보건정책이 나아가야할 방향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Q. 협회 및 위원장님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1988년 우리나라 전역은 올림픽의 열기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환희의 그늘 아래우리 원진레이온 근로자들은 이황화탄소 중독이 불러온 고통 속에 신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수많은 동료들이 쓰러져 가는데 세상은 우리의 아픔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고 느낀 우리는 아픈 몸을 이끌고 처참한 작업현실과 부조리한 산업환경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투쟁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재야의 인사와 의사 협회, 노조단체 등이 저희를 도와주셨지만 투쟁의 과정은 힘겨웠고, 우리는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88년 8월 18일 직업병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주축으로 현 협회의 전신인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자가족협의회를 결성했습니다.

이후 협의회는 지금의 원진산업재해자협회로 명칭을 변경했고, 저는 1999년부터 현재까지 협회를 이끌어 오고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원진레이온 재직 당시에는 이황화탄소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방사과에서 일을 했었으며, 84년부터 89년까지 원진레이온 노조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Q.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진레이온 사태가 많이 잊혀지고 있습니다. 간략히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원진레이온의 설립은 5.16 군사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추진됐으며, 1966년 12월 첫 가동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인견사제조업체로, 전국에서 최고의 직장으로 손꼽혔지요.

허나 실상은 달랐습니다. 이황화탄소와 유황이 가득한 유해한 환경 때문에 언어장애, 팔다리 마비 등의 직업병 환자가 속출했습니다. 그러던 중 1987년 1~2월 방사과에서 14~18년 동안 근무하다가 퇴직한 근로자 4명이 팔다리의 감각이상 및 마비증상 등이 오자 당시 노동부와 청와대에 진정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노동부는 조사를 통해 최초로 이황화탄소에 의한 직업병을 인정했고, 산재에 의한 요양승인도 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1988년 7월 22일 한겨레 신문에서 다뤘고, 이로 인해 원진레이온 산재가 전국에 알려졌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저희는 이 해 8월부터 성명서발표, 기자회견, 항의집회 등을 적극적으로 전개했습니다. 이에 따라 방사과 근로자들에 대한 특수건강진단과 방사과에 대한 작업환경측정이 시작됐으나 상황은 진전되지 않았습니다.

이후에도 후처리과, 원액과 등에서 근무하던 근로자들이 연이어 고혈압성 뇌출혈로 사망했고,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요양 중이던 근로자들의 자살도 잇따랐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원진레이온의 경영상황은 극도로 악화됐고, 결국 1993년 7월 폐쇄됐습니다.

Q. 당시 공정을 조금 설명해 주실 수 있는지요?

원진레이온의 작업공정은 크게 이탄과, 원액과, 방사과, 산회수과, 정련과, 포장, 제품출하 순으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이탄과는 탄소와 유황을 이용하여 이황화탄소를 제조하는 곳이며, 원액과는 펄프에 가성소다를 반응시켜 비스코스를 제조하는 곳입니다.

또 방사과는 황산에 비스코스액을 방사시켜 인견사를 제조하는 부서이며, 산회수과는 방사과로부터 황산용액을 회수하여 질산아연으로 산도를 조정하는 공정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밖에 정련과는 방사과에서 운반된 케이크를 수세, 탈수, 건조, 약품처리하는 부서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원진레이온에서 쓰이는 주재료는 유황, 이황화탄소 등으로 인체에 악영향을 끼치는 물질들입니다. 이런 유해물질이 사용됨에도 당시 사업장에서 지급된 안전장구라고는 손가락에 끼는 고무골무뿐이었습니다. 작업 환경도 미흡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섭씨 30도 이상의 온도 하에서 좋은 제품이 나온다는 이유로 흡기와 배기시설을 가동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근로자들은 작업 중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안질환을 겪어야 했으며, 기침이 멈출 날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고통은 작업장을 벗어난 후에도 계속됐습니다.

Q. 이황화탄소에 중독되면 어떤 증상이 있습니까?

이황화탄소는 불쾌한 냄새가 나는 무색 또는 담황색의 액체로 1800년대 중반 유럽의 성냥제조공장에서 인을 녹이는 용제로 처음 사용됐습니다. 이후 살충제, 네오프렌 시멘트, 셀로판지 제조 원료로 쓰이다 본격적인 산업기에 접어들며 비스코스 레이온 섬유 생산의 주 제조원으로 쓰였습니다.

이황화탄소는 호흡기나 피부로 흡수되는데 만성 노출 시 중추신경장해를 일으켜 무력감, 온 몸에 찌를듯한 통증, 우울증 등의 증상을 야기합니다. 이밖에 보행장해 등 말초신경계 질환, 심장질환 및 뇌혈관질환, 신부전증, 망막혈관질환 등도 불러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Q. 원진레이온 사태가 우리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보십니까?

국내 최대의 직업병 사건이자 세계 최대의 이황화탄소 중독사건으로 기록된 원진레이온 사태는 분명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역사의 씻을 수 없는 오점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국내 산업보건제도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것도 사실입니다.

먹고 살기도 급급했던 시절, 안전과 보건이라는 주제는 감히 근로자 입장에서 언급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고통 속에 근로자들은 누군가는 나서야 이 환경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에 나섰습니다.

그를 통해 열악한 당시 사업장의 환경이 공개됐고, 안전한 작업환경의 중요성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또한 산업재해에 대한 합리적인 보상체계도 구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안전과 건강 문제는 노동조합의 주요 과제가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안전교육과 직업병 개선을 위한 활동도 시작되었습니다.

Q. 현재 원진레이온 근로자분들의 삶은 어떠신가요?

혹자는 우리를 위한 병원도 생겼고, 보상도 많이 받았으니 평안한 삶을 살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들여다보면 저희는 여전히 산재의 어두운 그늘 속에 놓여있습니다.

뇌혈관질환, 심장질환, 호흡기질환 등으로 매년 여러명의 근로자가 숨져가고 있으며, 이들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택한 근로자도 부지기수입니다. 또 가장이 쓰러짐에 따라 붕괴된 가정도 한두개가 아닙니다.

특히 수백여명의 근로자들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불러온 우울증에 지금도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Q. 그동안 협회는 산재예방을 위해 어떤 활동을 해오셨나요?

우리 협회는 이황화탄소 중독 근로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단체로, 활동의 초점이 상당부분 여기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황화탄소 중독환자로 판정을 받고 산재 요양 중인 근로자들의 요양관리를 우선적으로 하고 있으며, 주요 활동은 진료 및 치료 상담과 보상업무 협조 등입니다.

또 환자들이 꾸준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적극 돕는 한편 우리의 권익을 보호하는 다양한 활동도 펼치고 있습니다.

이밖에 산재예방캠페인이나 안전교육 등에서 나서고 있으며, 지역내 불우이웃돕기 활동 등도 활발히 펼치고 있습니다.

Q. 향후 계획하고 있으신 협회의 운영 방안에 대해서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먼저 첫 번째는 다양한 산재단체와의 공조를 더욱 돈독히 하려 합니다. 이들과 연대하여 산재보험제도의 모순을 개선해 나가는 한편 산재예방활동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갈 방침입니다.

두 번째로는 원진레이온 피해자와 가족을 위한 위패보관소를 건립하고자 합니다. 이는 열악한 작업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투쟁에 나섰던 우리의 일기가 앞으로도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추진하는 것입니다.

병들고 지친 우리 근로자들은 점점 세상의 뒤편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허나 원진레이온 근로자 위패보관소가 건립된다면 그 상징성으로 말미암아 비록 우리는 사라질지언정 안전의 중요성은 영원히 이 땅에 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생존해 있는 피해자들이 여생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도록 요양원 기능을 갖춘 복지관을 건립하려 합니다. 우리의 고통은 삶이 끝나지 않는 이상 계속됩니다. 문제는 이 고통이 본인을 넘어 가족에게도 전염된다는 것입니다. 요양원이 건립되면 증상이 심한 근로자들은 보다 좋은 관리를 받을 수 있고, 그 가족들은 심적인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Q. 전국의 경영진과 근로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원진레이온 사태가 발발했던 1980년대에 비하면 지금은 사업장 환경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제규모와 비교할 때 이는 여전히 미흡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제가 경영진들에게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사업장의 유해물질에 대한 정보를 근로자들에게 공개하고, 이와 관련한 교육을 적극적으로 실시해달라는 것입니다.

정보가 제공되지 않고, 안전한 취급방법에 대한 교육이 없다면 근로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유해물질에 폭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근로자들의 경우는 자신의 건강은 자신이 지킨다는 의식을 갖고, 사업장에서 쓰이는 물질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와 함께 경영진이 실시하는 안전보건교육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직업병에 대한 인식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경영진이 근로자의 건강에 관심을 갖고, 근로자가 스스로 건강관리에 나선다면 유해물질로 인한 업무상 재해는 분명 감소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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