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우 고용노동부 국제협력담당관

최근에 ILO 이사회를 다녀왔다. 국제안전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었다. ILO에서도 산업안전의 주된 관심사는 산업안전보건관리시스템(OSHMS)과 위험성평가(Risk Assessment)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가 산업안전 분야의 국제적 메카트렌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의 공통된 인식인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국제안전의 흐름과 동향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혹여 철학적 바탕 없이 피상적 이해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 보았다. 여러 국제기구에서 기본원리로 공표된 지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이러한 국제적 기본원리가 정부와 산업현장에 충분히 인식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국제기구의 안전에 대한 원칙을 살펴보면, 안전에 대한 국제적 흐름을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안전에 대한 기본이념과 철학을 이해할 수가 있다. 안전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외형적 성장만으로는 한계가 명백하다고 볼 때, 국제안전원칙에 대한 이해는 안전의 내적·질적 성장을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다.

그리고 국가의 안전에 관한 정책과 기업의 현장 문제 해결을 위한 능력과 응용력 배양을 위해서도 국가와 기업 모두 안전에 대한 철학과 기본이념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선진사회의 오랜 경험과 전문적 논의를 거쳐 마련된 국제안전원칙은 정책수립과 현장집행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도 그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국제안전원칙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은 전략 없이 전쟁을 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충분한 논의 없이 법제도와 프로그램을 급하게 도입한 사회에서는 국제안전원칙에 대한 이해가 더더욱 필요하다. 국제안전원칙에 대한 이해의 바탕 없이 수립된 정책과 사업은 얼마 가지 않아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그간의 우리의 산업안전의 역사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ILO, ISO, IEC, EU 등 산업안전에 관계된 국제기구가 제시하는 안전관리에 관한 기본원칙은 모든 정책과 사업의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설계·제조단계에서의 대책을 중시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장의 우수한 작업자의 기능, 주의력에 의존하는 관리적 대책이 중심이지만, 국제안전원칙에서는 기계류의 설계·제조자가 중심이 된 설비대책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둘째, 휴먼에러의 배후에 잠재하는 근본원인을 중시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산업재해의 원인을 단순히 작업자의 실수(휴먼에러)로 간주하여 교육을 강화하는 대책이 일반적이지만, 국제안전원칙에서는 휴먼에러가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라도 그 배후에는 사람의 실수를 유발하는 설비대책의 잘못 등이 잠재하고 있다고 여긴다.

셋째, 사람은 실수하고 기계류는 고장과 트러블(trouble)이 발생한다는 것을 전제로 대책을 실시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기계류의 신뢰성 향상, 작업자에 대한 교육 강화 등에 의해 산업재해를 감소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국제안전원칙에서는 작업자의 실수와 기계류의 고장·트러블의 발생을 전제로 한 대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넷째, 안전한지 위험한지 알 수 없는 것은 위험으로 간주한다. 재해예방대책의 과정에서 때로는 안전한지 위험한지 모르는 것에 접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반드시 위험으로 간주하여 문제를 처리하여야 한다는 것이 국제안전원칙이다.

다섯째, 절대안전은 불가능하고 리스크는 반드시 잔류하는 것을 고려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산업재해는 본래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관점에서 무재해의 이념 하에 절대안전이 추구되어 온 데 반해, 국제안전원칙에서는 절대안전의 실현은 곤란하다는 관점에서 리스크(risk)의 개념이 발전되어 왔다.

여섯째, 재해예방대책과 안전입증의 절차는 공평·투명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안전성의 판단은 속인적(屬人的)이고, 때로는 불투명한 판단에 맡기는 경향이 있어 왔지만, 국제안전원칙에서는 안전하다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표준화된 절차와 객관적인 증거가 요구된다.

우리나라의 산업안전 분야는 그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기본원칙에 충실하기보다는 외형과 대증요법에 치우쳐 온 면이 크다. 그리고 철학적 기초 없이 추상적 수준의 거대담론에만 치중하다 보니 콘텐츠와 디테일은 빈약한 부분이 적지 않다.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지 않으면 산업안전의 선진화는 요원한 일이다. 국제안전원칙을 정책과 현장 속에 구체적으로 반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아킬레스건을 치유하는 포인트이자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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